
최용신
최용신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농총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순교자적인 활동을 한 애국지사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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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농총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순교자적인 활동을 한 애국지사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겨레의 후손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네 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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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된 농촌사회의 부흥을 위하여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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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선생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제 여주인공.
-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덕원에서 부친 최창희(崔昌熙)와 모친 김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조부는 사립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하였고, 부친은 1927년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최용신의 기독교 신앙, 교육가 정신, 민족 사상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 최용신이 농촌사업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1928년 함남 원산의 루씨여고보(樓氏女高普)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協成女子神學校)에 재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최용신은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는 생각에서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9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의 대표로 본격적인 농촌계몽사업에 참가하였고 황해도 수안(遂安)과 강원도 포항에 파견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 1931년 10월 YWCA 파견교사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泉谷-현재 안산시 본오동)에 찾아온 최용신은 먼저 예배당을 빌려 한글ㆍ산술ㆍ재봉ㆍ수예ㆍ가사ㆍ노래공부ㆍ성경공부 등의 학습을 시작하였다. 헌신적 노력으로 주민들의 이해를 얻어낼 수 있었고, 어려운 중에도 학원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YWCA와 지역 유지의 기금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32년 5월 정식으로 강습소 인가를 받았으며, 동년 8월에는 천곡학원(泉谷學院)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마을주민들과 YWCA의 보조로 학원 건축을 시작하여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 그러나 1934년부터 YWCA의 보조금이 끊어지고 학원의 운영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다방면의 노력을 강구하던 중 과로와 영양결핍으로 인한 장중첩증으로 사망하게 되었다(1935. 1.23) 최용신의 농촌을 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熏)의 소설 『상록수(常綠樹)』에서 실제화 되어 농촌운동의 귀감이 되었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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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선생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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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선생의 묘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 소재지 : 안산시 상록구 샘골서길 64
- 시대 : 일제강점기(1931~1935)
- 규모 : 봉분- 240x97cm 유적지-1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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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선생의 유언장
- 1.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샘골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해주시오.
- 2. 김군과 약혼한 후 10년 되는 금년 4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 3. 샘골에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가나.
- 4.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앞날을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앞날을 어찌하나
- 5. 어머님을 두고가니 몹시 죄송하다.
- 6.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 7. 유골을 샘골강습소 부근에 묻어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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