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이름 유래
선사시대
- 황금산 정상
대부도의 최고봉은 중앙부의 황금산(167.7m)다. 대부도가 독진(獨鎭)으로 독자석인 행정단위였을 진산 여겨진 산이다. 산을 중심으로 100m 내외의소규모 구릉성 산지가 북서 남동방향으로 뻗어 있었으며 산세의 방향은 탄도와 불도에서 시작하여 대부도 북서단 구봉이까지 연결되어 있다. 대부도의 산세는 험하지 않으나 평지의 규모가 크지 않고 대개 산지의 골짜기 따라 소규모로 나타나거나 해안 지역의 매립에 의해 형성된것들이 많다.
- 신석기 패총
국립박물관에서 대부도와 선감도에 대한 고고학적인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선감도에서는 뚜렷한 선사유적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부도에서는 흘곳과 말부흥에서 각각 선석기시대 패총을 발견하여 빗살무늬토파편 20 타제삭기 채집하였고 대부중학교에서 흘꽂 등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든 마제석부가 확인하였다.
2000년 도박물관에 재조사를 실사하여 대부도와 남쪽 탄도에서 신석기 조개더미 추가로 확인하였다. 중부흥과 말부흥에서 각각 대부북동 구봉이에서 구봉이 회센타 뒷산 언덕에서도 한곳이 발견되었으며, 선감동 탄도에 조개더미가 조사되었고 우리나라 서해안 지역의 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통부분에 무늬가 없는 것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몸통 아래무늬가 생략된 형식으로 볼 수 였다는 것을 연대를 선석기시대 중기로 잡고 있다. 그리고 다른 서해도서지방에 비해 사냥이나 농경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타제석기 마제석부 등이 출토된 사실을 가지고 당시 주민들 채취 등의 어로활동 이외에도 사냥,원시농업 등에 식량획득도 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삼국 고려시대 대부도
- 대부도 옛지명
고려시대에 대부도와 선감도라는 지명이 문헌에 차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대부도는 ‘ 대부도(大部島)’, ‘ 대부도 (大府道)’등으로, 선감도는 ‘ 선감미도 (仙甘彌島)’로 표기하였다. 선간미도(仙甘彌島)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때로는 ‘ 선감도 (仙甘島)’ 로 줄여서 쓰기도 하였으며 구한말부터는 선감도(仙甘島)만이 사용되었다. 한편 대부도가 섬의 모양이 낙지같다 하여 낙지섬,혹은 대나무가 많다 하여 죽호 흑은 모양이 연꽃이 울에 떠 있는 것과 같다 하여 연화부수지라고 도 불렸다고 전한다.
- 대부도와 삼별초
기록에는 대부도 주민이 몽고에 항거하던 원종 12년 호응하는 세력이 각 지방의 먼저 봉기한 말양에 호응하자”는 요지의 격문을 사방으로 돌린지 7일만인 1월 29일 개경에서 숭겸, 공덕등이 백성을 모아서 몽고관료를 살해하고 삼별초정부로 투신하려 하였다 이 파급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고 이 때 대부도에서도 몽고인을 살해하고 반기를 들고 일어섰던 것이다.
13세기는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대부도와 대부도 주민둘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때였다 그리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인 해도로 침입하여 강화도로 통하는 교통로를 자단하려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몽고에 항복파와 같이 개경환도에 반대하여 봉기한 삼별초정부를 지지하고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해 나갔던 것이다.
조선시대와 대부도
- 조선시대 대부도의 마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대부도 지역은 계속하여 남양도호부에 따르면 대부도에는 한때 사슴이 많아서 사슴을 잡아 진상했다는 사설과 함께 숙종 4년에 사슴이 멸종함 정도로 많은 수의 주민이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부도 지역에 상당수의 주민이 거주하였다는 사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주민이 거주하던 자연촌에 대부도면이 설치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변리제가 실사되던 18세기 중엽에 대부도면에는 722호 , 3,002명 (남 1,845, 여 1,157) 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19 세기 전반기의 사정을 알려주는 청구도에 기초한 대동지지에 는 대부도에 대하여 한결같이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다’라고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대부도에 독진(獨鎭)이 설치되어 주변 도서지역 읍을 포함하여 독자적인 행정단위를 가지고 있었다. 인구의 증가와 함께 촌락의 지명이 문헌에 등장하고 그 수도 점차 늘어났는데, 19 세기 전기에는 영전동, 홀곶 , 종현동등 3 개 촌락에 불과하던 것이, 19세기 후반에는 방아머리, 사동, 와동 , 화불리, 영전동, 당전촌, 마동, 고유지, 분지촌, 구역동, 망산리, 서촌, 진두, 선당리, 공현, 말부홍, 홀곶동등 18 개 촌락으로 증가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부터 문헌에 기록된 대부도와 선감도 외에 풍도, 불도, 탄도 등이 문헌에 나타나던 때였다.
풍도는 이미 성종 8 년(447) 부터 나타나는데 조선시대 말까지 풍도 표기하였다 불도는 1837년부터 그리고 탄도는 1871년부터 기록에 보이는데 불도와 탄리도로 표기하였다.
대부도에 군둔전설치가 처음 논의된 것은 성종 18 년 (1487) 정원이었다. 이 때 경기도 관찰사 성건이 대부도 지도를 왕에게 올라면서 “대부도는 토질이 비옥하고 기름져 가히 200여 석을 거둘 수 있고 해택이 있어, 역시 200여 석을 거둘 수 있으므로 마땅히 목장과 경계를 지어 말들이 넘나들지 못하게 하고 화량에 명하여 선군 가운데 반을 떼어 경작케 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 조선시대 대부도의 국영농장
조선시대에는 대부도 관내의 대부도 · 선감도 · 불도 · 풍도 등지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부도 목장이 언제 설치되었는 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세종 실록』 지리지에 기록이 된 것으로 보아 늦어도 세종이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에 대부도 목장에는 말 418필과 염전 4호가 소속되어 있였으며, 선조대에는 말 16필 에 목자가 348명 이 었다. 그리고 18 세기 중엽에는 568필과 839명 의 목자가 소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숙종 3 년(677)에는 제주도의 준마 68필 을 대부도목장 에서 번식시키기도 하였다.
선감도목장의 설치년도도 알 수가 없다. 그라나 세종 13 년(431) 에 사복시 제주가 세종 9년에 혁파된 선감도목장을 다시 설치하여 소들 방목하자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 9년 이전에는 선감도목장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대 전국의 목장 운영실태를 알려주는 목우도 에 따르면 29필의 말을 56명의 목자가 방복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풍도목장은 성종 8년에 영종도 소속의 목장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늦어도 이 때에는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라나 이후 가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는 폐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도지역의 목장도 감독관의 관할을 받았다. 감독관은 목장의 사육실태를 관리하고 군두,군부,목자륜 순찰, 감독하는 것을 직책으로 하는 종6품의 관직이었다.
조선시대 상업해로로의 대부도
- 대부도 옛지명
대부도는 서해해로의 중요 경유지였다. 대부도는 경기만 남부해로의 중요경유지였다. 조선후기에 상엽이 발달하고 각종 화물의 해상운송이 활발해지면서 이 해로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였다.
조선시대에 미곡 등의 수송은 주로 수운에 의존하였다. 특히 세곡은 각지의 창고에 집적한 후 내륙의 수로나 해로를 통하여 서울로 운송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선박은 원양항해에 적합하지 않았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조운선은 영산창, 법성장, 덕성창, 공세공장을 출발하여 대부도와 육지 사이의 수로를 거쳐 강화를 지나 서울의 경창에 도달하였다. 대부도 일대는 경기도의 안성,진위에서 출범한 조운선의 경로였으며,충청도 태안의 안흥진을 거쳐 온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운선 역시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18세기 중엽이후 갯벌은 넓어지고 토사가 퇴적되어 대부도와 육지 사이의 수로이용이 점차 곤란해지자 대부도와 영홍도 사이의 수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길은 수심이 갚고 조류가 빠른 곳이었으나 삼남의 세곡선과 대동선이 지나갈 때에는 물길에 익숙한 영흥도 주민 중에서 별장과 사공이 차출되어 인도되었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충청도의 포구 에서 출발한 선박들은 대부분 대부도와 영홍도 사이의 수로를 취하였다.
근·현재시대의 대부도
- 청일전쟁과 풍도해전
대부진이 혁파되기 1년 전인 1894년 에 대부도지역의 풍도 앞바다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1876 년 개항이후 조선에 대해 세력을 확장시키려던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벌인 것이다.
조선에서는 개화당 정권이 서고 내정개학을 단행할 즈음에 7윌 23일 일본 연합함대가 풍도 안바다에서 청국 군함 제원호, 광지호에 포격을 가하여 격침시킴으로써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는 선전포고가 있기 전의 기습공격이었다.
- 대부도 최초의 현대식 명칭
1909년 6 윌 에 법률 저11 20호 로 공포된 ‘지방구역과 명칭에 관한 건’ 에 의해 남양군의 행정구역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이 때 대부도가 설치되고 그 하부에 상동, 하동 , 흘곶동, 영전동, 종현동, 풍도 등 6개 동으로 나뉘었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은 리, 촌의 폐지 분합과 도령으로 ‘면내 경제 변경에 관한 건’의에 따라 대부도에도 다소간 변동이 생겼다. 이 때 대부도는 상동, 하동, 종현동, 영전동, 흘관동, 풍도 외에 새로이 선감동이 신설되었다. 이로써 오늘날의 대부도와 거의 일치 하는 행정구역이 이 때 이루어진 것이다. 1913 년 12 윌 29 일 부령 제 111 호 인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되었다.
이에 의해 대부도는 남양군에서 부천군으로 관할이 바뀌었으며 행정구역도 선감리(선감도와 탄도를 합친 것이다) 풍도리(풍도일원 도서를 합침), 동리(영전동과 하동 일부를 합침), 남리(홀곳동과 상동 일부) , 북리(상동과 하동 각 일부를 합침)등 5개의 리로 나누고 북리에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 대부도 3.1운동
그런데 일제시기에 대부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1910 년 일본의 침략주의에 조국을 빼앗긴 후 이에 항거한 국민이 1919 년 3 월 1 일 독립만세를 전개할 때 대부도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되찾고자 주민들의 의거가 있었던 것이다.
대부도 동리 김윤규(金允圭) 노병상()盧秉相) , 홍원표(洪元杓) 등 3인이 1919 년 3 월 31 일 대부도 영전리에서 만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하고 이날 밤 11 시 김윤규의 집에서 포목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다음날 오전 3 시 경 집 밖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니 이 곳의 주민이 합세하여 권도일의 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라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후 위의 3인 은 체포되어 각각 징역 10월 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대부도지역의 행정구역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가 1973년 7윌 1일 법률 제2597 호 에 의해 영종, 용유, 북도, 덕적, 영흥면과 함께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993 년 인천이 광역시로 재편되면서 영종면을 흡수하는 등 연안 섬지역에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1994년 12월 옹진군 대부면은 안산시로 편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