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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소개

김홍도의 그림세계

조선 후기화단의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이후)는 조선 전기 최대의 화가로 손꼽히는 현동자 안견(安堅, 15세기) 및 기우는 왕조의 말미에 마지막 타오르는 불꽃처럼 화사하게 장식한 오원 장승업(張承業, 1843~1897)과 함께 ‘조선 삼대화가’로 지칭된다. 그는 조선 그림의 독자성과 그 어엿함을 선뜻 드러내 조선화단을 화려하게 수놓은 기라성(綺羅星) 가운데서도 크기와 광채 모두에서 단연 돋보이는 큰 별 중의 큰 별이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김홍도는 단지 ‘풍속화(風俗畵)의 대가(大家)’정도로 알려져 있는 듯하다.

그는 신윤복(申潤福)과 더불어 풍속화의 쌍벽(雙璧)임에는 틀림없으나, 오직 풍속화에만 능한 화가는 아니다. 그는 전통 회화 모든 영역에 두루 뛰어난 대화가(大畵家)임은 생존했던 당시나 역대의 평가, 그리고 오늘날 유존되는 화적을 통해서도 선명히 확인된다. 한가지 소재만이 아닌 여러 가지 회화 영역에 두루 능했던 그야말로 서구의 르네상스에 비교되는 천재화가(天才畵家)라 하겠다.

해맑고 문기(文氣)있는 산수화

남종문인화 모두에서 어엿한 독자적인 화경을 이룩하였음을 증좌하는 명품이 적지 않다. 겸재 정선에 대해 그 정형(定型)이 이룩된 진경산수를 더욱 발전시켜 민족양식으로 뚜렷하게 부각시켰으니 이는 김홍도 개인의 업적을 넘어 조선회화사 전체를 빛나게 한 영광 그 자체이기도 하다. 김홍도의 진경산수는 겸재 정선의 영향하에 남종 문인화를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진일보시킨 그림세계이다. 정형산수(定型山水)등 그가 남긴 관념산수 계열의 그림 또한 비록 그가 사대부는 아니나 손끝의 재수에 의존한 평범한 화원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선비화가의 여기성과 격조를 반영하는 문인화의 세계 그 자체로 보아 손색이 없다. 이와 같은 화경에의 도달은 타고난 예술적 소양과 자질에 학문에의 열의등 사대부 뺨치는 학문 소양의 바탕 속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평범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어엿하고 국제적인 감각의 아름다움에로의 전이(轉移)는 그에 의해 확연히 이루어 졌다. 이점은 단원의 위대성이자 천재성(天才性)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익살과 낙천성이 깃든 풍속화

풍속화는 넓은 의미로는 일정(一定)시대의 세정(世情)의 풍습을 나타낸 그림 전체를 지칭한다. 사회각층의 생활상을 소재로 하되 생활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의례 (儀禮), 신앙, 놀이, 잔치, 생업장면(生業場面)등이 모두 포함된다. 일반인들에게는 풍속화가로 김홍도가 알려진 것처럼 이 분야에 명품들이 적지 않다. 김홍도는 실경산수화의 배경 위에 풍속화를 전개하여 치졸한 속화에 머물지 않고 의취(意取)가 보이는 격조 높은 전술한 마상청앵(馬上廳鶯)을 비롯해 34세 때인 1778년 그린 것과 그 보다 17년 뒤 1795년 가을에 그린 또 다른 대작등 8폭 병풍의 행려풍속(行旅風俗) 대작도 있다.

이와 달리 배경을 등한시하고 등장 인물의 행동만으로 화면 구성을 해 훌륭한 조화를 보인 보물 제27호로 지정된 25폭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풍속화첩>은 잘 알려진 대표작이다.

서민들의 생태와 등장 인물들의 개성이 선명히 드러나고 익살과 풍취가 엿보여서 보는 이로 하여금 내용 전달이 신속하고 선명하며 감동과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 그의 작품 특징이다. 생업에 분주한 부모 곁에서 독서에 열중하는 소년이 등장된 <자리짜기>나 훈장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는 <글방>등은 학문을 숭상한 유교 국가의 진면목을 진솔하고 해학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그림의 주인공은 장인에서부터 농부, 상인,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 두루 망라되고 있는데 생업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놀이처럼 즐기는 듯한 밝은 표정들에 건강미가 넘친다. 반면 곁에 있는 양반 계층이 자못 무료한 모습으로 묘사되어서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인간미와 泰然함을 함께 한 古事人物圖 外

인간적인 신선(神仙)이란 점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도깨비나 귀신에 얽힌 민담이나 전설 등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시화한 조형 예술이 적은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우리 한민족의 어진 심성을 대변하는 것이며, 나아가 익살스러운 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안압지 진흙 속에 묻혀 천수백년 동안 깊은 잠을 자다가 20세기 후반에 깨어난 귀면을 살펴보면,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한 본체가 오히려 반대로 겁먹은 양 어느 정도는 어리석게 조형된 사실로써도 이 점은 선명해진다 하겠다.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는 일찍이 고유섭선생께서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찾아내 김홍도의 작품목록에 언급한 바 있던 그림으로 2폭이 산락되어 8폭이 아닌 6곡병풍 상태로 남아있으나 1800년 56세 국왕 정조에게 진상하였던 그림이다. 1778년 34세작인 서원아집도 (西園雅集圖) 6폭 병풍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아마도 궁중소용의 병풍으로 사료되는 그림으로 방정한 서체와 인물묘사의 유연성과 구도의 묘 그리고 구성 및 기량의 정도를 가늠케 하는 명품이다.

간 송미술관 소장의 <고사인물도>병풍 8폭은 조선인들이 흠모한 중국고사를 하나의 틀로 해서 완성한 그림들이다. 1801년 57세작인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는 화재로 인해 불타버린 면이 있으나 병풍 전체가 한 폭으로 연결된 대작으로 이 또한 중국고사에 연원을 둔 그림이지만 이를 우리적으로 충분히 소화해낸 그림이다. 1805년 61세작인 추성부도(秋聲賦圖)는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으로 간주되는 그림으로 노대가의 완숙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걸작이다.

서정성이 짙은 영모화

영모란 새깃과 짐승털의 의미로 날짐승과 길짐승 모두 즉 동물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북송대까지만 해도 영모화가 새와 동물을 포괄하는 그림의 개념으로 쓰인 경우는 드물었으며, 오히려 화조문(花鳥門)의 한 지류로 간주된 듯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영모의 뜻이 원래 글자 의미 그대로 오늘날에는 새와 짐승의 그림 즉 광의의 동물화로 이해되고 있다. 영모화는 화본(畵本)을 통해 익히기도 하고 이를 베껴 그릴 수도 있지만 소재 자체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사생에 의해서 화폭에 옮겨지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교류에 의한 중국의 영향과는 별개로 표현 기법이나 독자적 화풍 형성에 있어서, 그리고 민족정서의 표출에 있어서 보다 순조롭고 자유스러운 이점과 장점을 지닌 분야이기도 하다.

김 홍도의 영모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본격적인 영모화 이외의 범주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실경산수 중 이른 시기인 전술한 <금강사군첩>에서는 인물이 매우 작게 나타나 있는데 이와 동가(同價)의 비중으로 새들이 등장되고 있다.(호해정, 능파대, 죽서루, 청간정, 문암) 이는 실제 정경을 사실대로 옮기는 당시 상황에 기인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화면에 등장 여부는 그리는 이에게 달린 것으로 위도성 여부와는 별개로 타인과 구별되는 깊은 관심과 예리한 시선으로 보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34세 때 그린 8폭 병풍으로 된 전술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행려풍속 (行旅風俗)>에서는 5점에 각기 돼지, 까치, 백로, 물새 등은 등장시킨데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보물로 지정된 25폭으로 된 <풍속화첩>에 속한 <점심>이나 <고기잡이>에 등장된 개와 물새들도 같은 양상이다. 이 외에 도석인물화에서도 신선과 관련된 사슴, 소, 당나귀, 양 등은 화면 내에 크게 부각되어 있어 그의 영모화 이해에 간과(看過)될 수 없는 것들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화단의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이후)는 조선 전기 최대의 화가로 손꼽히는 현동자 안견(安堅, 15세기) 및 기우는 왕조의 말미에 마지막 타오르는 불꽃처럼 화사하게 장식한 오원 장승업(張承業, 1843~1897)과 함께 ‘조선 삼대화가’로 지칭된다. 그는 조선 그림의 독자성과 그 어엿함을 선뜻 드러내 조선화단을 화려하게 수놓은 기라성(綺羅星) 가운데서도 크기와 광채 모두에서 단연 돋보이는 큰 별 중의 큰 별이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김홍도는 단지 ‘풍속화(風俗畵)의 대가(大家)’정도로 알려져 있는 듯하다.

그는 신윤복(申潤福)과 더불어 풍속화의 쌍벽(雙璧)임에는 틀림없으나, 오직 풍속화에만 능한 화가는 아니다. 그는 전통 회화 모든 영역에 두루 뛰어난 대화가(大畵家)임은 생존했던 당시나 역대의 평가, 그리고 오늘날 유존되는 화적을 통해서도 선명히 확인된다. 한가지 소재만이 아닌 여러 가지 회화 영역에 두루 능했던 그야말로 서구의 르네상스에 비교되는 천재화가(天才畵家)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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