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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소개

성호이익

성호이익 사진

성호 이익의실학사상은

아름다운 문장이나 시문에만 매달리지 말고,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 실제로 유용하고 실효성 있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호 이익의 학문과 사상은 여러 제자에게 계승되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성호 이익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이 경신환국 때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된 곳에서 태어났다. 이듬해인 1682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별세하자 이후 어머니 권씨 부인과 함께 안산 첨성리(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서 자라면서 10세 무렵부터 둘째 형인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웠다. 25세 때인 1705년에 과거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였다. 다음 해 스승인 형 이잠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리자 역적으로 몰려 옥사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익은 벼슬에 뜻을 버리고 평생을 안산에 거주하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여 「성호사설(星湖僿說)」, 「곽우록(藿憂錄)」, 「이선생예설유편(李先生禮說類編)」, 「사칠신편(四七新編)」, 「성호질서(星湖疾書)」 11종, 「이자수어(李子粹語)」 등 실로 방대한 저서를 남겼으며, 특히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 실학사상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익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안정복(安鼎福), 윤동규(尹東奎), 신후담(愼後聃), 권철신(權哲身), 정약용(丁若鏞) 등이 있어 이익의 사상을 계승, 체계화함으로써 실학사상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또한 집안 후손들 중에서도 아들 이맹휴(李孟休), 조카 이병휴(李秉休), 손자 이구환(李九煥), 이가환(李家煥) 등은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익의 실학사상의 핵심은 아름다운 문장이나 시문에만 매달리지 말고 백성들이 살아가는 데 실제로 유용하고 실효성 있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반도 무위도식하지 말아야 하며 농민 중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있으면 뽑아 관직에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의 철저한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양반과 천민, 선비와 농민 등의 차별을 타파하고 나아가 노비의 해방까지도 주장하여 양반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익은 토지제도에 있어 한전론(限田論)을 펼쳤다. 토지 소유의 하한 기준을 정해두고 그 이상의 것은 자유롭게 매매를 허용하되 하한선 이하의 토지는 매매를 금지함으로써 토지 균분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토지 매매에 대해서도 관청에 보고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한편, 이익은 「화포잡영(花浦雜詠)」이라는 시에서 “저 넓은 갯벌에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소금기를 없앤다면 광활한 옥토가 되어 농토가 없어 굶어 죽는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니 좋은 계책을 백성에게 물어 이루라” 라고 읊었으니, 그의 간절한 이상이 200여 년 후인 현재 이루어져 안산 시민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다. 이익의 방대한 저서는 후손들이 귀중하게 보관해오다 국립중앙도서관 및 성호박물관에 기증하여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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