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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소개

최정걸 장군 묘

최정걸 장군 묘

최정걸은 조선 중기의 충절공신이며 병자호란 때 단신으로 적진에 출격하여 적의 머리 일곱 급을 베어 어전에 바쳤다. 이후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여 이듬해 병조참판을 추증받았다.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문화재 제8호
  • 소재지 : 안산시 상록구 사동 산92-7
  • 지정일 : 1991.11.2.
  • 시대 : 조선 중기

최정걸(崔挺傑, 1587~1636)은 양주최씨 시조 억(億)의 12세손으로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어려서부터 궁술과 기마에 능하였고 충효의 덕목을 갖춘 덕장의 자질을 보였다. 최정걸은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까지 지낸 후 귀향(안산시 사동 감자골)하여 지내고 있던 중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함을 알고, 50세의 나이에 단신으로 왕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종군하였다. 최정걸은 적진으로 단신 출격하여 적의 머리 일곱 급을 베어 바치니 인조는 크게 감동하고 그 충용을 포상하여 술을 내렸다. 그러나 결국 청과 강화를 하려 하자 최정걸은 이튿날 다시 적진으로 돌진하여 분전 끝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최정걸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병조참판에 추증하였고 후하게 장사지내었으며 정문(旌門)*과 사패지(賜牌地)**를 내려주었다. 병자호란 당시 전국의 근왕병들이 인조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청군을 물리치고 남한산성에 입성한 경우는 최정걸이 유일하였다고 한다.

최정걸과 관련된 한 가지 전설이 구전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최정걸의 묘는 일명 ‘머리 없는 장군의 묘’로 불린다. 최정걸은 전장으로 떠나기 전날 밤 부인에게 속적삼을 달라고 말하였는데 부인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내가 죽으면 무엇으로 나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만약 전사하여 머리가 없다면 신원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전사한 후, 시신을 찾으려고 하였는데 찾을 수 없어 옷을 모두 벗겨 보니 여자 속적삼을 입은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속적삼을 보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의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 정문(旌門) : 효자, 충신,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세운 붉은 문

** 사패지(賜牌地) : 임금이 나라의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나누어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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